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5월13일은 레클리스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날이다.
레클리스는 마지막으로 제대할때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다.
말이다.
말이 하사 계급장?
처음듣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말인가 할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리얼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한국이름 아침해인 레클리스에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곳 백학에서 나고 자랐지만 백학을 너무 몰랐다.
아니, 관심도 없었던거 같다.
군대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하느라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생활에 젖어있을때
백학은 서서히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농사일이 전부인 이곳에서 젊은 사람들이 뭔가 해볼수 있는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4년 현재 연천은 인구소멸지역이다.
아무리 좋은 인구 유인정책을 쓰더라도 체감할정도로 효과를 보기에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제일 시급한 것이 젊은이들을 유인할수있는 문화관련 시설과 프로그램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여튼 백학을 떠나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이들어 다시 내려와서
부모님과 친척 어르신들을 가까이 모시면서
돌봐드리고 있는데 백학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게 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영웅군마 레클리스'와 '지게부대' 이야기다.

말이 대체 어떤 일을 했길래 계급장까지 받았을까. 


지금은 백학의 절반 이상이 북한에 넘어가 있어서 미수복지역으로 남아있는데 
지도에서보면 내가 살고있는 백학면의 모양이 한반도의 축소판이다.
거기에 우연인지 모르지만 허리부분으로 휴전선이 지나가고 있어
한반도를 축소해서 보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38선과 휴전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매현리가 있다.
지금은 비무장지대내에 있어서 접근이 불가하다.

그곳에서 1953년 3월26부터 30일까지 미해병대와 중공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네바다전초전투' 또는 '매현리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전투에서 레클리스가 하루에 약 4톤씩 탄약을 등에지고
아군이 있는 고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일반 성인 12명 정도가 할일을 혼자 해냈던 것이다.

 

원래는 '아침해'라고 부르던 경주마 였다.
48년도에 태어나 경주마 훈련을 받으며 신설동 경마장에서 
뛰는 꿈을 꾸었을 것인데
50년 한국전쟁이 나자 경주마에서 피난마차를 끄는 말이 되고 만다.

 

그렇게 피난생활을 하던중에 부모님은 포탄을 맞고 돌아가시고 
누이마저 다리를 크게 다치고 만다.
소년이 아침해와 피난생활을 하던중에 운명처럼 미해병대 장교를 만나게된다.

 

얕은 산이 많은 백학에서는 군용트럭도
큰 도움이 되지못했다.
고지전이 많은 전투에서 사람이 할수없는 탄약수송에 적합한 말을 찾아 다니던 
페더슨 중위였다.  
말 주인이 된 소년과 합의하던 중 누이의 의족을 마련할수있는 비용인 250달러를
받고 말을 미 해병대에 넘겨주게 된다.

경주마-피난마차-미해병대 군마


이렇게 레클리스는 드라마같은 '마생역전'의 길을 걷게 된다.

 

경주마에서 정식 미해병대 군마가 된 레클리스는
몇번의 훈련을 받게 된다.
탄약을 싣고 고지를 오르면서 길을 익히고, 적 포탄이 떨어지면
은폐 엄폐를 하면서 아군 해병대원들에게 안전하게 탄약을 전달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머리가 좋았고 용감했던 레클리스는 몇번의 루트를 익히고 나자
탄약만 등에 실어주면 혼자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군에게 전달하는 루트를 가면서 두번의 포탄 파편에 맞았지만 
도망가거나 겁먹지않고 평소처럼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부대내에서 대원들과 친하게 지냈던 레클리스는 
사회성이 너무좋아 초콜릿과 맥주를 얻어 마시기도하고
텐트에서 병사들과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이름이 '아침해'였는데
해병대원들이 너무 용감하고 겁도없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을보고
'무모하다'라는 뜻으로 레클리스(reckless;사전을 찾아보면 무모하다.무분별하다,신중하지못하다라는
뜻으로 나오는데 부정적인 단어이지만 이것은 그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목숨을 아끼지않고
용감하게 고지를 향해 오르는 레클리스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표현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인터넷을 검색하면 레클리스는 당시 레클리스가 옮겼던 탄약이 무반동총에 쓰였는데 이것의
별명이 레클리스였다고 한다)

 

모든 사실들은 당시 같이 전투를 했던 해병대원들이 생생하게 증언한 것이다.

 

네바다전초전투가 끝난 후 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레클리스는 어떻게 됐을까?

 

워낙 뛰어난 활약과 가족처럼 지냈던 레클리스였지만
건초등 먹이를 마련하는 것과 부대 이동시 많은 인력이 레클리스를 관리하기위해
전투력에 누수가 생기는 점등 
관리하는 것에대한 애로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또 다시 운명처럼 부대내에 글을 잘쓰는 장교가 있었는데
그때 상황등을 미국 본토에 글을 통해 알리게 됐고
레클리스의 활약은 전쟁중이었지만 미국에 여러번 소개가 되었기때문에
모금운동이 일어나고 미국의 어느 선박회사의 사장은 요코하마까지
레클리스를 데리고오면 배를 보내서 무료로 데려오겠다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군마 레클리스는 배를타고 미국에 도착하여 
환대를 받았고 20살까지 살면서 새끼를 4마리 낳았다.
미국에서 제대하고 하사 계급장을 정식으로 달게된 레클리스는
성대한 제대의식과 함께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편안한 목장생활을 할수 있었다고 한다.

 

방송에도 출연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던 레클리스는 안타깝게도 
68년 5월 13일 부상 후유증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미 해병대 본부에 조각상이 세워지며 매년 기념행사를 해주는
그야말로 '영웅 군마'로 남게 되었다.

 

퍼플하트 훈장등 총 5개의 훈장을 받게되었으며 
레클리스와 관련한 많은 다큐멘터리 그리고 책이 출판되었다.

 

2024년 5월13일

이런 사실들을 널리 알리고 훌륭한 말이 이곳 백학에서 활약했다는 것을
우리뿐 아니라 미국에까지 전해질수 있도록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다.

 

원래는 23년 테마골목 사업계획서를 준비하면서 
레클리스의 '가묘'를 만들어 연례행사로 만들고 이것을 미국에 전달해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게하고
안보관광지로서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것이다.

 

가묘를하려면 좋은 위치에있는 누군가의 땅을 내놓아야하는데 그것부터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더 이상 미루면 안될거 같아 아침해광장이 조성된 곳에서 시작하게 된것이다.


레클리스에 대한 추모행사가 급하게 준비되어 부족한점이 많고 아쉽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서 출발하게 했으니
해마다 조금식 보완하여 백학면민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로 거듭날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기를 희망해본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 !!
We won't forget forever~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현수막을 3곳에 설치하였다.
비룡대교부근,백령교,그리고 아침해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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