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백학초등학교 뒷쪽을 보면 얕은 동산이 있다.
어린시절 누비고 다녔던 곳이고,
추억 가득한 공간이었다.

 정상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사유지가 된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바위에 올라서 탁트인 공간을 바라보면 눈에 띄는 것이 
꽃봉과 만가대 벌판이다.

꽃봉위로 백학교회가 있는데 그 뒷쪽 능선이
석장리까지 이어져있다.

저마다 어디서 들었는지 꽃봉에서 시작되는 산을
뱀,거북이,이무기등 여러가지로 부르곤 했었다.

꽃봉은 한국전쟁이 끝난후 순차적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많이 머물렀던 임시 거처였다고 한다.

열묘각시라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한데
흙을 덮고 파헤치는 과정에서 원님의 부인이 죽어나가기 시작해서
열개의 무덤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꽃봉을끼고 높은골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만가대라고 부른다.
지금은 그냥 넓어보이는 논이지만,
아주 오래전 만가구의 집이 들어설만큼 번성할것이라는 
얘기가 있을정도로 좋은 자리였다고 한다.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만가대의 모습과 
열묘각시전설도 들으면서 잠시 일상속에서
쉬어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 꽃봉과 만가대 관측위치 : 백학면 두일리 1087-1 부근
   (백학초등학교 뒷산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멋짐. 트레킹코스 개발중)

꽃봉의 위치는 백학면사무소 북쪽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
석장리 차일봉에서 남쪽의 꽃봉까지 약3km에 이르는
산부리가 새의 주둥이처럼 길게 뻗어 있어,
고어 ‘곶’과 ‘뫼’를 써서 ‘곶뫼’라고 불렀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곶 ->꽃(花)으로 대역하여 지금의 ‘꽃뫼’ 또는 ‘꽃봉’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웃에 있는 마을도 이 봉우리를 기준으로 하여, 
‘윗꽃뫼’, ‘아래꽃뫼’로 잘못 표기되어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열묘각시꽃봉에 대한 전설]

고구려때, 꽃봉 북쪽에 있는 마을 높은골(高村洞)에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었는데, 
어느날 새로 부임한 원님의 부인이 바람이 나서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원님은 분개하여 자기 부인을 처형,
꽃봉에 묻고 또 다시 이런 변이 일어나지 말라고 무당을 불러 ‘자리걷이 굿’을 하는데
무당의 점괘가 서남쪽 산위에 꽃모양의 바위를 흙으로 덮어야 후일 우환이 없어진다고 하니,
원님은 무당의 말을 믿고 그 바위를 흙으로 덮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뒤로부터 이 산 아래에 있던 마을에 괴질이 돌고, 
가축이 이유없이 죽는등 온 마을 전체가 심한 병고에 시달리게 되고, 
우환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다급해진 마을 사람들은 다른 무당을 찾아가 물어보니 
그 이유가 꽃뫼에 있는 꽃바위를 흙으로 덮어 산신이 크게 노한 까닭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 말을 들은 꽃뫼 마을 사람들이 이 꽃바위를 원래의 모습대로 파헤쳐놓자,
그 즉시로 마을에 일던 재앙이 그쳤다 한다.

그러나 다시 재혼한 높은골의 원님 부인 역시 또 바람이 나서 
외간남자와 놀아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안 원님은 둘째 부인도 처형하여 매장하였는데, 
이곳에 와보니 꽃바위가 흙에 덮혀 있으므로 밤중에 흙을 모두 파헤졌다 한다.

그 후 이 바위를 놓고 꽃뫼 마을 사람들과
원님이 사는 높은골 마을 사람들 사이에 묻고 파헤치고 하기를 10여차례 하다보니,
원님의 후취, 3취, 내지 10취까지 모두 간음한 죄로 죽어서
이 봉우리 정상 부위에 원님의 부인 묘 10기가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었으며,
그 후로 후세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열묘(十墓)각시 꽃봉 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만가대]

열묘각시꽃봉 오른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높은골.
고구려때에 고을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앞의 넓은뜰이 바로 ‘만가대’이다.

한자로 풀이하면 '萬 家 垈' 만채의 집이 들어선다는 터,
즉, 큰 마을이 들어설수 있는 좋은터가 있는 곳이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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