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 입구에 소나무들을 휘감고 있던 계요등.
멀리서보면 하얀 솜뭉치같은 것들이 매달려있는듯 보이지만 가까이가면 사진처럼 복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닭오줌냄새가 난다고 한다.
심한 것은 아닌것 같다.
매년 보던 계요등군락이었는데 올해 지나다보니 소나무외에 어떤 잡풀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면도하듯이 깨끗하게 주변을 잔디와 소나무만 남기고 정리해버렸다.
나름대로 없애게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하게 환경미화나 심미적인면에서?
집 주변에도 2년에 몇번씩 봄 가을에 나무들 가지치기를 한다.
사설 용역업체에서 나와서 한다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한다는 믿음이 가질 않는다.
흔히 말하는 현장담당자의 지시에 따라 시간을 다투어 가지들을 쳐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정리해서
일잘하고 간듯한 내색을 한다.
몇년전에 사설 유치원에 백당나무던가 아니면 노간주나무던다 학교 울타리에 많이 심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3미터 정도 됐으려나? 하여튼 유치원에와서 노는 아이들이나 지나는 사람들을 소리없이 지켜보던 나무였는데
깨끗하게 앞뜰을 정리한다는 명분아래 무참하게 잘려져 나갔다.
그 일이 있기 얼마전에 어떤 아이가 친구와 근처에서 놀면서 이런말을 했다.
'이 나무는 노래하는 나무야'라고 그 옆을 지나다가 난 너무 충격을 먹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순수하고,솔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은새들이 그 속에 들어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그렇게 표현했던것 같다.
참새나 오목눈이같은 작은새들의 임시 피난처이기도 했고, 한겨울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신음소리 한마디없던 나무였다.
나무가 잘려나가면서 그곳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고, 아이의 순수함도 이젠 찾기 힘들다.
얼마전에는 경로당의 감나무가 열매를 다 맺기도 전에 잘려져 나갔다.
해마다 주렁주렁 가지가 부러질듯이 감을 선물해주던 나무였는데 어떤 이기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그런 나무가 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돌봄이 필요했던가.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다.
너무나....
낙엽성 관목의 덩굴식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남부지방에 분포하며 대청도와 울릉도까지 바다를 따라 올라가 산지나 해변에서 자란다. 덩굴줄기는 길이 3~6m 정도이고 윗부분은 겨울동안에 죽으며 어린 가지에 잔털이 다소 있다. 마주나는 잎은 길이 4~10cm, 너비 1~7cm 정도의 난형 또는 난상 피침형으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6~7월에 원추꽃차례로 피는 꽃은 백색에 자주색 반점이 있다. 열매는 지름 5~6mm 정도로 둥글며 황갈색으로 익고 털이 없다. ‘호자덩굴’에 비해 덩굴성이고 잎은 낙엽성이다. 관상용으로 심는다.
‘닭’과 연관된 풀 종류로는 닭의난초, 닭의덩굴, 닭의장풀이 있으며, 나무로는 계요등이 있다. 계요등은 길이가 5~7미터 정도에 이르며 잎이 지는 덩굴식물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식물의 줄기를 만나면 왼쪽감기로 꼬불꼬불 타고 오르지만, 신세질 아무런 식물이 없어서 땅바닥을 길 때는 덩굴을 곧바르게 뻗는다.
어떻게 해서 ‘계요등(鷄尿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계요등이 한창 자랄 때 잎을 따서 손으로 비벼 보면 약간 구린 냄새가 난다. 그래서 계요등의 다른 이름은 구린내나무다. 또 속명 ‘Paederia’는 라틴어의 ‘paidor’에서 유래되었는데, 역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봄과 여름에 냄새가 더 심하고 가을이 되면 거의 없어진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혐오감을 줄 정도로 냄새가 지독한 것은 아니며, 더욱이 양계장에서 풍기는 진한 닭똥 냄새와 비교하여 그다지 역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름을 붙일 때는 좀 과장되기 마련이다. 우리 이름인 계요등은 글자 그대로 닭 오줌 냄새가 나는 덩굴이란 뜻이다.
꽃말은 [지혜로움]
*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
; 호주의 작가인 마리 에센바하(1830∼1916)의 「잠언집」에 나오는 말이다.
기쁨에 잠겨 있는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기 쉽다. 고통에 잠겨 있는 사람은
고통을 떨쳐버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려 든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며 환경을 개선하고 잘못을 수정한다. 그런 경험은 영혼의 성장에 크게 도
움이 된다. 또한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옛 소련의 문예평론가인 우라지밀 푸리츄도 『인생은 학교다. 그리
고 행복보다 불행쪽이 더 좋은 교사다』라고 말했다.
* "말하는 것 두배는 남에게서 들어야 한다"
;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의 말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한 개의 혀와 두 개의 귀를 주었다』고 이어진다. 인간
에게는 혀와 두 개의 귀가 주어져 있는 것이니 혀의 두배로 귀를 기능시켜
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는 서로간 말의 교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면 그것은 연설이나 강의가 되고 만다.
영국의 정치가 와이드빌은 『현자의 입은 마음속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
음은 입안에 있다』고 했다.
영국속담에는 『현명한 자는 긴 귀와 짧은 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