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비교적 흔하게 보이는 침노린재 종류인데 아직 성충은 아닌것 같고

거의 다 자란 상태인걸로 보인다.


침노린재 종류는 보통의 노린재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작은 곤충을 사냥해서 돌돌 돌려가며 몸에 침을 꽂아서 체액을 흡입한다.



Sphedanolestes impressicollis



몸길이 : 12-16mm
몸은 흑색바탕에 회황색 또는 흰색 얼룩무늬를 갖는다. 등면에는 광택이 있다. 머리는 작고 길며, 겹눈 사이에는 가로홈이 있다. 더듬이는 가늘고 길게 발달하여 몸길이보다 약간 짧다. 제 1마디가 가장 길고, 제 2마디는 가장 짧다. 앞가슴등판은 검고 잔털이 드물게 나 있다. 중앙부에 십자모양의 홈이 파였으며, 앞모서리는 회황색 또는 흰색 무늬가 나타나기도 한다. 앞날개는 혁질부가 갈색을 띠고 반투명하며, 막질부는 투명하고 배 끝을 초과한다. 배마디는 옆가장자리가 폭넓게 확장되어서 앞날개 옆으로 둘출하였고, 마디마다 흑색과 흰색 또는 회황색 무늬를 가진다. 다리는 길게 발달하였고, 허벅마디에 3개의 흰색 고리 무늬를 갖는다. 또한 뒷다리 종아리마디의 기부 근처에도 흰색 고리 무늬가 1개 나타난다.






* 관료주의적 방법은 (a)인간을 마치 사물처럼 관리하고, (b)수량화와 관리를 보다 쉽고 값싸게 하기 위해 사물을 질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양적인 관점에서 관리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관료주의적 방법은 통계적 데이터에 의해 시행된다. 즉, 관료주의자들은, '그들의 눈 앞에 서 있는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책임'에 기초를 두고 결정을 내리지 않고, 통계적 데이터로부터 나온 고정된 규칙을 기초로 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들은 통계적으로 그 경우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에 따라서 어떤 문제를 결정하므로, 그 틀에 적용되지 않는 5~10%의 사람들은 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관료주의자들은, 개인적인 책임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규칙의 이면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그들의 안전과 자부심은,인간 양심의 법칙에 대한 충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규칙에 대한 충실성에 있는 것이다.
아이히만(Eichmann)은 관료주의자의 극단적 표본이었다. 아이히만이 수십만의 유태인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던 것은, 그가 그들을 증오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의무를 완수'했던 것이다. 그는, '유태인을 독일로부터 추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직 규칙에 복종하는 일뿐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에만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진술(이것에 의해서 그의 입장은 더욱 나빠졌다)에 의하면, 그가 죄책감을 느낀 것은 어린 시절에 학교에 무단 결석한 일과 공습이 있었을 때 대피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일뿐이었다. 이것은 아이히만과 다른 많은 관료주의자들에게 새디즘적(sadism)인 요소, 즉,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을 지배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가학성 변태성욕적 요소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디즘적인 경향은 관료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일차적 요소가 아니라 이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일차적 요소는, 인간적 반응의 결핍과 규칙에 대한 숭배인 것이다.
 나는, 모든 관료주의자들이 아이히만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관료적 지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학적 의미에서는 관료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대부분의 경우 관료주의적 태도는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거나 그(혹은 그녀)의 인간적인 면을 말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료주의자들 중에는 아이히만과 같은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과 아이히만의 유일한 차이는, 그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병원의 어떤 관료주의자가, 병원의 규칙상 의사를 거쳐온 환자만을 입원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매우 위급한 환자의 입원을 거절했다면, 그 관료주의자의 행위는 아이히만이 했던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또, 그 사회의 관료주의적 규칙 중의 어떤 조항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자기를 찾아온 어떤 사회 보장 수혜자를 굶어죽도록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사회 복지 상담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관료주의적 태도는, 의사,간호원,학교 선생,교수들에게도 있으며, 아내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수많은 부모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이 숫자로 변모되면, 진정한 관료주의자들은 극도로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행위와 일치하는 엄청난 잔인성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에게서 아무런 인간적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주의자들은 새디스트(sadist)만큼 포악하지는 않지만 새디스트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관료주의자들에게는 양심과 의무 사이의 갈등조차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양심이란 그들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감정 이입과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립된 지 오래된 기업이나 복지 후생성,병원,형무소 등과 같은 큰 조직 속에는 아직도 불친절한 구식 관료주의자가 있으며, 그런 곳에서는 단 한 사람의 관료주의자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서 어떤 쾌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들은 불친절하지도 않고 새디즘적 경향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서도 사물-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체제'-에 대한 관료주의적 충성심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체제'를 신봉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회사는 그들의 가정이며, 회사의 규칙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 체제 속에는 옛 관료주의자도 새로운 관료주의자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관료주의적 정신과 개인에 의한 능동적 참여 정신은 양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 과학자들은, 단순한 규칙의 적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상황에 대한 책임에 의해 움직여지는 관료주의적이 아닌 대규모의 새로운 행정 형태를 고안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인간과 상황에 대한 책임의 잠재적 자발성을 중요시하고, 절약이라는 맹목적 숭배물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비관료주의적 행정의 실현은 가능하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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