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원래의 목적은 절보다는 절 주위에 있다는
꽃을 담기위해 찾았던 곳이다.

동막리 계곡을 굽이굽이 몇키로쯤 갔을까.
생각보다 긴 도로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보니 
그동안 불법영업을 하다가 더 이상 못하게된
영업시설들이 흉물처럼 방치된 모습도 보이고 
얼마나 깨끗한 자연을 맘대로 유린하고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을까 상상하니 괘씸함을 넘어 측은함마저 들었다.
어쨌든 이제는 못하게 됐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건전하게 이용할수 있는 계곡이 될수 있도록 
우리모두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얼마쯤가다보니 분기점을 만났다.
직진하면 내산리로 넘어가는 길이고 우회전하면 
심원사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돌려서 조금 가다보니 
왼편으로 항일의병비가 세워져있다.
심원사가 항일의병 주둔지 역할을 했다는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이 희생되었고,
후에 시신을 수습하여 안치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조금 올라가다보니 
심원사지부도군의 모습이 보인다.
사전 준비없이 오다보니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앞에서
평소에 무지하고 관심없는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서 
원심원사에 도착하게 됐다. 

목탁소리외에 너무 조용한 산사.
70년전 그리고 100여년전의 전투,함성,비명소리
붉게물든 계곡....
잠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비명에간 의병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마음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뜻을 모아야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산리 계곡 깊은 곳에 위치한 심원사는 연천 의병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심원사에 주둔했던 의병부대 800여 명과 의병장 허위를 잡기 위해 1907년 9월 27일 김화수비대와 연합토벌대가 심원사로 접근,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고, 이 중 6명의 시신이 대광리역에 인근 구릉에 안치되었다. 2012년 대광리의 6인 묘와 무명 의병 3인 묘를 수습하여 심원사 경내에 안치하였고, 2016년 일제강점기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비를 세우고 추모공원을 조성하였다.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본래는 20여 기가 있었다고 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며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으로, 이곳의 부도는 우리나라 전형적인 형식인 팔각원당형과 고려 시대 말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유행했던 석종형을 취하고 있다.

심원사의 연혁에 관해서는 1942년 간행된 『楡岾寺本末寺誌』의 심원사지 편에 상세히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가 영주산(현 보개산)에 영원사, 법화사, 흥림사, 도찰사를 차례로 창건한 후, 859년(헌안왕3)때 범일국사가 흥림사(興林寺)를 중창하고 천불(千佛)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심원사는 1393년(태조2)의 화재로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고, 3년 후 1396년(태조 5년) 무학대사가 건물을 삼창(三創)하면서 영주산을 보개산으로 흥림사를 심원사로 개칭하였다. 

1402년(태종2), 왕위를 물려준 태조가 안변 석왕사로 가기전 심원사로 향하였다는 기록은 태조가 이 사찰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15세기 대표적인 시인 김시습이 이 사찰을 소재로 시를 지을 정도로 번성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592년(선조 28년) 4창되어 서산대사의 법맥을 잇는 소요(逍遙), 태능(太能), 제월(霽月), 경헌(敬軒) 등 조선 중기의 선승들과 수많은 학승들이 주석 정진하는 도량이 되었다. 

1907년 정미의병사건 때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항쟁하던 의병과 관군의 공방전 속에서 장래의 화근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관군에 의해 250여 칸의 건물과 1,602위의 불상이 잿더미로 변하면서 심원사는 완전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1909년부터 점차 복구되어 1937년 주지 이진학(李鎭學)의 노력으로 유점사 본말사지에 전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본전인 천불전, 신신각, 춘향각, 요사채 등 모두 8동의 건물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비껴가지 못하고 건물은 모두 전소되었으며 전쟁이후 얼마 전까지 사찰의 명맥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군사보호구역으로 남겨져 보개산 심원사의 기둥을 헐어 철원 심원사의 법당인 명주전을 건립하면서 심원사의 사적은 철원 심원사로 이전되게 되었다.

2003년~2009년 동안 발굴조사를 통하여 총 5동의 주 불전 건물과 스님들이 생활하던 다양한 승방들이 확인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현재 본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천불전, 산신각 등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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