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 이 글은 연천군에서 오랜세월 향토사학자로 활동하시고 누구보다도 연천을 사랑하시고 바른 역사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계시는 '최병수 선생님'의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에 삽입된 사진만 최근 것으로 교체했습니다.*

 

백학면 구미리 마을 앞을 흐르는 구연강(龜淵江). 강 언덕 너머에 구연동이 있다.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는 본래 옛 적성(積城縣)의 북면(北面) 지역으로, 임진강에 깊고 큰 구미소(龜尾沼)가 있으므로 구미연리(龜尾淵里)라 하였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구미리(九尾里)로 개칭이 되었다.

구미소(龜尾沼), 구연(龜淵)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유래는 풍수리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구미리 마을의 전체적인 형국이 거북이가 진흙땅에서 꼬리를 끌며 물에 들어가는 모습인 금구예미형(金龜曳尾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소() 옆에 임진강 쪽으로 돌출해 있는 큰 바위가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며, 자손번영과 음양의 생기가 화합하는 명당의 혈()에 해당되는 꼬리 부분은 구연동(龜淵洞) 쪽으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 되어 금구예미를 구미(龜尾)’ 두 자로 줄여 구미소라 하였고, 부근에 있는 마을 또한 구연동(龜淵洞)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구연동(龜淵洞)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말 조선 초 학자였던 권 근(權近)과 그의 아우인 권 우(權遇)의 고향이다. 그들이 이곳에 살았을 때 지은 주옥과도 같은 시가 전해지기에 이를 통해서 그 옛날 아름다웠던, 아니 지금도 아름다운 구미리(龜尾里)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며 옛 일을 상고해보고자 한다.

 

권 근(權近)과 권 우(權遇)의 고향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권 근 옛터(權近 舊基)라 하여 여말 조선 초 학자이며 명신인 양촌 권 근(權近, 13521409)과 동생인 권 우(權遇, 13631419)의 출생지가 구연동(龜淵洞)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輿地圖書)보다 227년 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적성현 산천(山川)조에는 권 우(權遇)의 구연동 시문(詩文) 네 수가 소개되어 있어 그들의 고향이 구연동(龜淵洞)임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 龜淵江 詩 1 - 권 우(權遇)

前壓淸江後背山 앞에는 맑은 강, 뒤에는 산
一區形勝是天慳 구연동의 아름다운 경치는 하늘이 숨겨두었던 곳
縈紆細路田畦裏 꼬불꼬불 소로 길 밭 고랑 사이로 나있고
隱晄虛樓樹木間 보일락 말락 빈 누각은 수목 사이에 있네.
芋栗滿園供異味 동산에 가득 찬 토란과 밤 맛이 별미이고
風烟隨處足奇觀 풍연이 닿는 곳마다 경치 또한 별천지일세.
吾生最恨牽塵世 지난날 티끌 많은 세상에 끌렸던 일 한스러워라
此地何當得自閑 어찌하면 이 고향에서 한가히 놀 수 있을까?

이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 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미관말직부터 시작해서 왕조가 바뀐 조선왕조 초기에도 여러 벼슬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 집현전 직제학과도 같은 고위직을 역임하고 나중에 세종임금이 되는 충녕대군의 세자빈객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등, 주요한 관직을 역임하고 순탄한 삶을 살았던, 권 우(權遇)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시로 마치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이라도 구연동(龜淵洞)에서 이 시를 읽으면 주변의 풍경과 너무 잘 맞아 떨어져,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매우 서정적인 시이다.

수월정이 있었다고 추측되는 위치에서 내려다본 구연강의 모습


구연동 경치는 하늘이 숨겨두었던 곳

권 우(權遇)14살에 고려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녹문첩사, 장흥고사, 군기주부 등 여러 곳의 실무책임자를 거쳐 엘리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이조좌랑까지 올랐다. 그리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등용되어 세자로 책봉된 충녕대군을 가르치는 세자빈객의 자리에 까지 오른 것을 보면 대학자인 형 못지않게 학문적 실력은 물론, 처신에 있어서도 귀양을 가고 굴곡이 많았던 형 보다는 오히려 존경받고 순탄한 삶을 살아왔던 권 우(權遇)였다.

그런 그가 고향에 돌아와 과거를 후회하며 자연으로의 귀의(歸意)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있는 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적성현의 산천(山川) 편에 구연강(龜淵江)이라는 제목 아래 게재되어있는 시는 모두 이곳의 경치를 묘사한 시이기에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 龜淵江 詩 2 - 권 우(權遇)

幾度曾相憶 몇 번이나 서로 생각했던가,
如今喜得歸 지금에야 돌아옴 기꺼워라.
淸江一曲續 맑은 강 한 굽이 둘러있고,
列岫 四方園 여러 묏부리 사방으로 에워싼 곳.
隔岸呼舟渡 건너 언덕에서 배를 불러 강을 건너고
尋村得路微 마을을 찾아 길 물으니 희미하구나.
兒曹知我至 아이들 나오는 줄 알고
相引出柴扉 서로 끌며 사립문 나서더라.


* 龜淵江 詩 3 - 권 우(權遇)

昔日會遊地 옛날 한 차례 놀던 이곳
山深草木荒 산은 깊고 초목은 무성하구나.
行尋溪水淨 깨끗한 시냇물 가면서 찾고
坐歇樹陰凉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쉰다.
彌望無人跡 멀리봐도 인적은 보이지 않더니
旁看盡鹿場 곁을 보니 모두가 사슴들 놀이터네.
今來偏有喜 지금 와서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은
寒裏足耕桑 추위 속에서도 뽕나무밭 갈기에 족하구나.

 

 

학곡리쪽에서 바라본 구연강과 수우리고개(움푹 들어간곳). 양수장근처가 미산개 나루가 있던 곳이다. 

 


* 龜淵江 詩 4 - 권 우(權遇)

瀟灑江邊一草亭 서늘한 강가에 초정이 하나
眼前佳景妙難形 눈앞의 경치는 형용하기 어렵네.
微風欲起波光動 바람이 살짝부니 물결이 일고
細霧初飛雨氣冥 안개가 날아가니 비가 오려나.
疊疊靑山臨石壁 푸른 산은 겹겹으로 돌벽을 임했고
雙雙白鳥落沙汀 백조는 짝을 지어 물가 모래에 내린다.
家尊晩歲來怡養 아버지께서 만년에 와서 봉양을 편히 하매
幸我如今得問寧 나 지금 문안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네.

 


지금까지 세간에 권 근(權近)의 고향이 그와 후손들의 묘가 있는 충북 음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권 근(權近)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권 근(權近)과 권 우(權遇)의 원 고향은 바로 구연동임을 알 수가 있다. 먼저 소개한 권 우(權遇)의 시()도 그렇지만 권 근(權近)이 지은 시가 이를 말해준다.


사향운(思鄕韻) - 고향을 그리는 노래 권 근(權近) 지음

白雲天末是吾鄕 흰 구름 뜬 저 하늘 끝이 바로 내 고향인데
處處登樓客恨長 여기저기 누각에 오르니 나그네 시름만 길어진다.
最憶南江煙雨裏 남강의 물안개 너무 그립고
釣船終日泛滄浪 낚시배 종일토록 푸른 물결 위에 띄웠었지요.

만약 권 근(權近)의 고향이 내륙지방으로서 큰 강도 없는 충북 음성이라면 이러한 시구는 지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래 시도 권 근(權近)의 고향이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시이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구연강의 모습

 

* 장단노상환경작(長湍路上環京作) - 장단 노상에서 서울로 돌아오며 권 근(權近)

出城三日靡遑安 성을 나간 삼일에 편안할 틈 없어
恐有天章下九關 천장이 구관에서 내려올까 두렵다오.
依樣葫蘆慙薄技 호로병 본을 뜨니 재주 얕아 부끄럽고
不材樗擽玷淸班 쓸모없는 저력같은 신세로 맑은 벼슬 더럽힌다.
尙憐湍水朝宗遠 장단 물은 어여쁘다 바다로 빠지고
遙望崧山漂緲間 송악산 바라보니 아득한 사이에 있도다.
芳草長程風日暖 방초 우거진 먼 길, 바람과 햇볕 따뜻하고
行吟兀兀跨驢還 나귀 등에 높이 앉아 시 읊고 돌아가노라.

관직에 있던 권 근(權近)은 근무처인 개경(松都)을 떠나 삼일간의 말미를 얻어 잠시 집에 다니러 왔다가 돌아가면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3일의 휴가를 얻었지만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3일 동안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니 마음이 몹시 바빴던 것 같다. 자신의 집인 구연동(龜淵洞)을 출발하여 바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산개나루에서 배를 타고 신지개(神智江)나루(백학면 학곡리)를 거쳐 장단나루(두지나루: 파주시 적성)에서 배를 내렸다. 그리고 나귀를 타고 송도로 돌아가면서 멀리 송악산이 보이자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시를 마무리 짓고 있다.



백학면 노곡리에서 바라본 송악산 줄기.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보인다.

 


대문장가 권 근(權近)

양촌(楊村) 권 근(權近)은 여말 조선 초 문신으로서, 학자로서 고려 왕조는 물론 조선왕조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큰 인물이다. 격동기인 공민왕 17(1368) 성균관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할 정도로 권 근(權近)은 철저한 친명 유학자였다.

고려 말 전환기에 몇몇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당하고 석방되어 충주에서 우거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태조 2) 이태조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에 달려가 생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이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 바쳤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하여 예문관 대학사, 중추원사 등 을 지내고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다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를 강론했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 까지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대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다.

구연강(龜淵江)과 수월정(水月亭)

지금도 구미리에는 권 근(權近)과 권 우(權遇) 형제와 관련된 지명이 일부 남아있다. 그 중에 하나가 수우리 고개(水月峴). 수우리 고개에는 양촌(陽村) 권 근(權近)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정자 수월정(水月亭)’이 있었기에 수우리 고개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학곡리에서 구미리로 넘어가는 고개, 경계지점인 수우리 고개에 강과 달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했던 수월정(水月亭)이 있었기에 권 우(權遇)의 시에도 그 내용이 등장한다.

 

隱曂虛樓樹木間(은황허루수목간)’ - 보일락 말락 빈 누각은 수목사이에 있네.‘

 

여기서 말하는 빈 누각이 바로 수월정이다. 구연강과 천연의 석벽이 어우러져 정자가 없는 지금도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수우리 고개 정상에서 보면 구연동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권 우(權遇)가 집에 앉아 수월정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는 정경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수우리 고개 정상에서 바라본 구연동 마을.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수월정(水月亭)이라는 멋들어진 정자가 있었던 수우리고개에는 정자는 사라지고 형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 한마디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땅 주인이 원래 있던 모습을 바꾸고 인위적인 정원을 만들고 있어 조금은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번 기행을 마치며 사족을 붙인다면 구한말 경술국치 이후 약 100년 동안의 격

동기(일제 강점기부터 1950625 동란 이후 60여년)를 거치면서 이 땅에 살던 기층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향토의 역사는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져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매년 연천문학지에 내 고장 기행이라는 글을 연재하는 목적도 그동안 찢겨지고 흩어졌던 향토의 역사를 복원하고, 내 고장 연천의 진정한 모습과 가치를 내외에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은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초 대 문장가였던 권 근(權近)과 권 우(權遇) 형제의 원 고향을 제대로 밝히는 것은 어쩌면 미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명확한 사료와 근거가 있음에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은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후손들의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금번 구연동(龜淵洞)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도처에 이러한 경우가 너무 많기에 후학들이 하루빨리 이를 찾아서 복원하지 않는다면 연천의 향토사는 영원히 묻히고 사라져서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수월정(水月亭)이 있었던 수우리 고개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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